∽ 어제와 다를 것 없이 똑같은 하루가 시작됐다. 5분 간격으로 맞춰둔 알람을 하나씩 끄고 좀비처럼 일어나 서늘한 공기에 쫓기듯 샤워를 마치고 나와 역시 사람은 밥심이라면서 커피와 함께 토스트를 먹으며 잠깐의 여유를 즐긴 다음 부랴부랴 옷을 차려입고 집을 나선다. 정리 안 된 옷장 서랍마냥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쑤셔 넣어진 출근길 버스와 지하철을 갈...
청년의 목적지는 기차역에서 고작 걸어서 오 분도 안 되는 거리에 위치했다. 그 말인즉 이곳은 시끄러운 증기기관차의 기적 소리는 물론이거니와 기차역을 드나드는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번잡한 소음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흐트러진 모자를 고쳐 쓴 청년은 집주인처럼 아담하고도 발랄한 색상의 건물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뭐가 좋다고 일부러 이...
그맘때는 사랑이 고질병이었다. 살아 있는 것, 특히 그 꼴로 대책 없이 사람을 사랑하는 바람에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버텨내다 종국에는 한도를 넘어 거듭 인간으로 태어나는 낡아빠진 넋들이 많았다. 악마로서의 시간을 오롯이 즐기며 만끽하는 헬릭은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었다. 다만 저들이 그리 어리석은 걸 보면 확실히 악마라는 족속의 뿌리가 인간임이 이해가 된...
“허어엉……. 누나아……. 또 내 물 뺏어갔지…….” “넌 좀……. 미르엘라 님, 다녀왔는데……, 저녁, 저 식사는……, 저희가 늦었, 으음…….” 그날 저녁, 마인 남매는 오랜만에 만난 고향 친구들과 술을 많이 마신 건지 아니면 원체 술이 약한 건지 길바닥에 정신을 반쯤 떨궈놓은 채 귀가했다. 리칸은 그나마 류를 버리지 않고 챙겨 올 정도로는 분...
두 사람 몫의 차를 끓여 온 데이안이 합류하면서 분위기는 다시 맑게 갠 하늘처럼 화사해졌다. “그 와중에 하르카인이 딱 지금 이 표정으로 에실전서 1장 3절을 외면서 무시하고 지나가는데, 저는 어디서 이런 걸작이 나타났나 했습니다. 그때부터 제가 이 친구를 따라다니면서 귀찮게 했지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각자 하르카인을 처음 인지했던 날로 화제가...
달빛의 눈길과 바람의 손길로 은파가 넘실대는 밤. 한 기사가 한밤의 가을공기를 뚫고 매섭게 달리고 있었다. 오늘 시에랑에 가겠다던 미르엘라의 마음이 바뀌었을지도 모르거늘 아무런 확인도 않고 무작정 달렸다. 아늑한 흰달꽃의 향기가 가을바람을 타고 실려 오는 곳으로. 새하얀 은월과 눈부신 꽃밭 사이에 둘러싸여 있을 미르엘라에게로. 하르카인은, 모든 것을 고백할...
“안녕히 주무셨나요?” “응. 둘 다 잘 잤어? 근데 오늘은 뭐 재밌는 소식 있나 봐?” 추수제까지 엿새 남은 여느 평범한 가을 아침, 나른한 걸음으로 아래층에 내려온 미르엘라는 류가 붙들고 있는 《연화일보》 쪽으로 턱짓하며 물었다. 평소라면 신문지를 얼추 다 훑고도 남을 시간이었건만 지금껏 읽고 있기에 꺼낸 질문이다. “아, 재미는 없지만…… 미르엘라 님...
하르카인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미르엘라는 저녁식사를 마친 뒤 그대로 식탁 앞에 눌러앉았다. 리칸이 악마의 아이를 임신한 사람을 만나고 왔으니 그의 보고를 듣기 위함이었다. “다음 달 초순쯤 연락이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야기에 따르면, 리칸은 머지않아 정식으로 설립될 어린이집에 대하여 간결하게 설명해주는 한편 지금 뱃속에 있는 것은 아직 생명이라 이르...
추수제를 일주일 앞둔 어느 청명한 아침, 하르카인과 데이안은 기상하자마자 중앙 신전으로부터 급보를 받았다. “이런.” 소식을 확인한 데이안은 탄식했고 하르카인은 침묵했다. 그 내용인즉슨 또 다른 방락자의 검거. 이번엔 튜헨 화백과 달리 중범죄를 저지른 방락자가 치안대의 추격 끝에 붙잡혔다고 한다. 사건 발생 위치는 수도 라쿠스에서 쉬지 않고 말을 몰아 세 ...
“미르엘라.” 그 미끼는 당연하게도 하르카인이 미르엘라에게서 찾으려 하는 특정 정보. 도대체 어떤 경위로 그 정보가 미르엘라한테 있으리라 판단 내렸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만. 미르엘라는 흥미의 지속을 위하여 쉬이 답을 던져주지 않을 셈이었으며, 달빛 머리의 기사는 이미 그날 밤 마왕의 미늘에 걸렸다. 사실 어찌 보면 미르엘라로서는 그믐밤 ‘그믐’ 앞에서 이 ...
이튿날, 아기자기한 청록색 사기그릇을 구입해간 평범한 손님을 배웅하며 미르엘라는 오늘 가게에 들르겠노라 편지해준 새 친구를 기다렸다. 하르카인과 만나는 것은 그믐밤의 급작스러운 조우 이후로 닷새 만이라 기대가 되었다. 이 교류의 이면에 감춰진 신성 기사의 깜찍한 꿍꿍이속은 그다지 걱정스럽지 않았고 도리어 그런 점까지 미르엘라를 기쁘게 했다. 사람이란, 으레...
자유로운 창작이 가능한 기본 포스트
소장본, 굿즈 등 실물 상품을 판매하는 스토어
정기 후원을 시작하시겠습니까?
설정한 기간의 데이터를 파일로 다운로드합니다. 보고서 파일 생성에는 최대 3분이 소요됩니다.
포인트 자동 충전을 해지합니다. 해지하지 않고도 ‘자동 충전 설정 변경하기' 버튼을 눌러 포인트 자동 충전 설정을 변경할 수 있어요. 설정을 변경하고 편리한 자동 충전을 계속 이용해보세요.
중복으로 선택할 수 있어요.